심리학에서는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가 일치할수록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나‘와 스스로를 ‘바라보는 나‘와의 괴리감이 적을수록 자아는 건강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를 숨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살아가면서 누적된 외상의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100% ‘바라보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 바로 ‘아이’ 다. 아이는 있는 그대로 진실을 이야기하며, 부끄러움 또한 느끼지 않는다. 그것도 잠시, 유년기를 지나면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은 나’ 등 사회화를 통해 ‘보여지는 나’의 자아가 압도적으로 자라난다. 아마도 ‘바라보는 나’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성인은 타인의 평가, 거부와 비난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일 것이다.
정신건강의 척도로 꼽는 자기개방을 적절하게 잘 하는 것은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에 대해 숨기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자신에게 ‘선’일 수 있어도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인 것이다. 거짓말은 자신의 체면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무의식과 마음은 보호하지 못한다.
사람마다 각각의 ‘유별남’은 있다. ‘고유함’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사람마다 성향적으로 과잉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유별남’이라 표현한다. 이 ‘유별남’은 ‘바라보는 나’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상대에게 투사하는 순간 ‘유별남’은 소거된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점점 타인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보여지는 나’의 비중을 키우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 ‘라는 문장은 이제 이렇게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판단되고 평가될 것을 알아. 하지만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어.”라고 기꺼이 자신의 '유별남’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과 다른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인식되는 것이니까. 그런 사회가 된다면 비교에서 멀어지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타인이 사라지면 내가 누구인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필요도 사라진다. 이 완벽한 자유는 곧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배경 감정 (0) | 2022.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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